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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건/미제사건

1년만에 발견된 '료우에이마루 호' , 노트 3권의 진실...

by O.N.E 2020. 11. 30.

 

 

 

 

 

 


(일부 사진은 이 사건과는 관련없는 사진입니다)

 

 

 

1년만에 발견된 '료우에이마루 호' , 노트 3권의 진실...

1927년 10월 31일.

캐나다 벤쿠버에서 출발해서 미국 시애틀 항구로 항해중이던 마가렛 달러 호는

문득 멀리보이는 작은 배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 배는 파도에 몸을 맡긴채 술렁술렁 넘어오고 있었죠.

그는 이런 망망대해에 엔진도 켜지않고 있다는게 이상해 보였죠. 

선체의 전체적인 모습은 굉장히 낡은 느낌이였고, 돛 대 또한 반쯤 꺾여 있었으며 아무응답도 없었습니다. 

심각하다고 느낀 마가렛 달러 호 선장은 상대 배를 향해서 천천히 접근을 하게 됩니다. 
배에 가까워 갈수록 악취가 심하게 풍기고, 배에 완전히 다가가서 본 선체의 모습은 충격적이였습니다. 

선내에 들어가서 관찰하던 선원은 발에 뭐가 밟혀 들여다보니 사람의 두개골이였으며, 그뿐만 아니라 이미 미라화가 되어가고 있는 2구의 시신과 부서진 백골, 절단된 신체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선원의 눈에 3권의 작은 노트가 들어오게됩니다. 그 노트를 본 선원들은 깜짝 놀라게 되는데 그 노트 안에는 지난 10달동안 이 배에서 벌어진 일들이 세세히 기록이 되어 있었기때문이죠.





때는 1926년 12월5일.

일본 와카야마현 선적 소속이였던 소형 어선 료에이마루호가 어획작업을 하기 위해 미사키항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배는 다음날인 12월 6일.

오전에 모모코항이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는데 선장은 엔진에서 약간 거슬리는 배기음이 난다는 것을 듣고 

엔진을 재정비 했고, 12월 7일 오후 다시 어획을 하기 위해서 출발하게 되죠.
 
약 100km정도 갔을까.. 거기서 조업이 시작됐는데 이들은 여기서 고기잡이를 한 후에 

천천히 미사키항으로 돌아갈 계획이였죠. 하지만 상황이 순탄치 않게 흘러게 됐습니다. 

 

서쪽에서 계절풍이 불어왔는데 이게 점점 더 강해져 파도가 거체지게 됐고, 

그렇게 돌풍으로 이어졌지만 다행히 배가 부서지지도 않고, 인명피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배는 방향을 잃어버리게 되고 안에 있던 선원들은 불안해지게 됩니다. 

그러던 12월 12일 오전 엔진에 결함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요회이마루호는 운행을 할수 없게 됐는데 당시 1920년대에는 어선에 무선통비장치가 없어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죠. 며칠 간에 폭풍으로 인해 바다에 조업을 나온 다른 배들도 없었죠. 

지금 있는 바다가 어딘지도 모르는채 배는 멈췄고 문제의 노트속 항해 일지는 이때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항해 일지의 기록 

12월 12일 오전

돌연 엔진의 크랭크샤프트가 끊어졌다. 우리는 길을 잃었다. 

궁리끝에 어쩔수 없이 돛을 감아올리기로 했고, 그저 서풍에 맡겨 배를 띄우는데 의미를 둘것이다. 

아마도 언젠간 육지에 도착하거나 다른배를 만나 구조가 될거라는 희망을 갖고있었던 것 같아 보이지만... 

이후 3일동안 또 거센 서풍이 불어오게 됩니다.
 
이 12명의  선원들은 꼼짝없이 15일까지 표류되고, 다행히 오후에 들어 바람이 수그러들게 되죠. 

하지만 이때 상황은 이미 돌아가려고 하는 곳으로 부터 1,600km정도 

떠내려간 상황이였기 때문에 출발지로 돌아가는건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 나오죠. 


이때 항해 일지에 의하면 북서족으로 부터 20톤 정도 규모에 배 한척이 다가옴. 

선원들은 깃발을 올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구조요청을 함. 

하지만 그 어선은 그냥 지나쳐갔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음날인 16일 오전 7시와 10시에도 2척의 배를 발견하게 되어 미친듯 구조요청하게 되죠.

이때 역시 항해 일지에 따르면,
우리는깃발을 올려 크게 소리쳤고 불까지 피워가며 구조요청을 보냈지만 상대 배들로 부터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죠.





저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는데.. 
그 때 목격을 했다던 3척의 배가 대형 크기의 선박이였다면 작은 배인 료에이마루 호의 구조신호가 잘 안보였을수도 있지만, 항해일지에 따르면 3척의 배 크기가 료에이마루 호의 크기와 비슷했다고 합니다. 


깃발을 흔들고 불까지 피웠는데도 정말 그들을 인지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후에도 료에이마루 호는 그저 조류의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떠내려갔고,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게됩니다. 

그러다 마지막 항구에서 엔진을 고치고 배를 띄운지 무려 19일이 지난 12월 26일 선장이였던 미키 토키조는 "이렇게 된 이상 서풍을 타고 미국으로 떠내려 가자"라는 역발상을 하게 됩니다.  쉬운일이 아니였지만 그동안 엔진수리를 계속 시도해봤지만 실패를 하게 되고이미 일본과는 반대 반향으로 계속 가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생각이 됩니다.

항해일지에는..


" 어떤 노력을 해도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은 게속 서쪽을 향한다. 우린 다른배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며 미국으로 표착을 결정했다. "라고 쓰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배에는 다행히 12명의 선원들이 약 4개월정도는 버틸수 있는 충분한 음식이 있었고, 어부였기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조업을 할 수 있어 버티는건 문제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12월 27일 일지에 따르면 

다랑어 10마리를 잡았다. 우리는 모두 웃으며 기뻐했다. 

그러나 먼 바다에 표류되니 파도도 바람도 아예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불안감이 더해진다. 

종종 생선이잡히지 않는 날엔 해초나 새를 잡아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먹을게 있다는게 다행이다. 

이후 항해일지는 며칠이 더 지나 새로운 해가 되는 1월 1일 일지로 넘어가게 되는데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모두는 오늘도 망망대해에서 가족들을 그리워 합니다. 

결혼을 안한 선원들은그나마 다행이지만 처자식이 있는 선원들은 안타까울 뿐이네요. 

라는 말을 적어놓습니다. 

 

이 새해 첫 날의 일지 이후 포류 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선원들이 지치게 된 탓인지 

노트를 적는 횟수도 줄어들게 되는데, 아무것도 안적은 날도 있고, 

그냥 흘러가는 방향만 간략하게 적어둔 기록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작은 희망을 적은 내용이 있었는데 
1월 27일 외국 함선을 발견했다. 그리고 구조요청을 했지만 응답이 없다. 

비가 내릴것 같으니 빗물을 모아두었다가 식수로 사용해야 겠다. 라는 내용이였습니다. 
이 때는 이미 이들이 바다에 표류한지 약 2달정도 되는 시점이였고, 

그 이후로 시간이 더 흘러서 2월 17일 부터는  선내의 식량이 점점 바닥나고 있어 불안해 하고 있는 모습이 느껴지게 됩니다. 여전히 그들을 발견한 배는 없었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포류 3개월 정도가 되던 3월 5일끝내 모든 식량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미 배 안에서는 영양실조나 여러 질병을 앓고 있던 선원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지게 되죠. 





이후 3월 6일의 기록을 보면

식량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물고기도 잡히지 않는다. 

무서울 정도의 배고픔이 죽음의 그림자를 서서히 드리워오게 하고 있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뿐만 아니라 이날 선원들은 단체로 유서를 남기게 됩니다. 

유서의 내용을 보면.
지난 12월 5일 카나가와현의 미사키 어항을 출항하여 조업 중 엔진기관 부분이 부러져 식량 

백미1석 6두로로 오늘까지 목숨을 보전하다 기선의 등장도 어떠한 용기도 없어 우리는 여기서 죽기를 결심한다.

라고 적힌 유서와 함께 선원들의 이름이 각각 적힌 봉투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일부 잘라

동봉했는데 이는 이들은 배가 침몰하더라도 유서와 신체의 일부라도

언젠간 가족에게 닿아서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쓴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3월 7일


첫 사망자 발생하게 되는데, 기관장이였던 호소이덴지로는 

일본땅을 한번만이라도 밟고 싶다고 중얼거리다가 숨을거두게 됩니다.

 

선원들은 모두 슬퍼 하면서도 힘든 몸을 일으켜서 그를 수장하게 되고, 
이후 선원 들의 죽음은 연이어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틀 후인 3월 9일

커다란 상어 한마리가 잡혔지만, 나오에 죠지는 먹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아 계속 누워만 있다 결국 말라죽게 됩니다. 
일지 기록에 따르면, 우리는 그의 시신 역시 수장하기로 했다. 라고 기록을 하였고, 

3월 15일

이제까지 항해 일지를 써왔던 이자와 히로시가 병으로 씨름하다 끝내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의 기록은 나 마츠모토 겐노스케에 의해서 쓰여지게 될 것이다. 라고 적으며,

이 자의 시신을 수장하기 위해 우리는 안간힘을 썼다.

다들 창백하고 수염이 거칠게 난 얼굴을 하고 있고 망령처럼 휘청거리며 걸어다닌다. 이 모습이 참으로 슬프다. 

3월 27일

일지 테라다 하츠조와, 요코다로우노스케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후지산!! 후지산이 보여 미국으로 갈 필요가 없어 무지개도 있어!!" 라면서 광기를 보였고,좌현의 갑판을 이로 바득바득 갉아먹다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우리는 말릴 힘도 없었다. 이젠 정말 지옥의 밑바닥과 가까워 지는 것 같다. 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이어진 일지는. 3월 29일

눈다랑어 한마리를 요시다토키치가 낚는것을 보던 미츠야 엔키치가 갑자기 돌변했고, 도끼를 들어올려 요시다 토키치의 머리를 박살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광경에도 우리 모두 일어설 기력도 말릴 기력도 없어서 그저 멍해져 있었다. 

이제 선원들은 괴혈병 증상을 보인다. 잇몸에서 피가 철철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요괴로 변해가는 듯 하다.

4월 4일

미키 토키조 선장이 갑판 위로 나르고 있는 큰 새를 빠른 속도로 낚아챘다. 

이때 선원들은 마치 식인 개미때와 같은 모습으로 몰려들었고, 살아있는 새의 날개를 뜯어내 그대로 먹었다.

이틀후인 4월 6일

츠치 토라지가 핏덩이를 뱉어내며 사망했다. 

4월 14일

사와야마 칸쥬로가 함실에서 갑작스럽게 광분하며 사체를 조각 냈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정말 이곳이 지옥이 아닐까 싶었다. 인육을 먹을 기력이라도 남아있다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5일후인 4월 19일

사와야마 칸쥬로와 토야마 카즈오가 요리실에서 인육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귀신들과 같았는데 어쩌면 이들도 살고 싶어서겠지.. 두사람은 오늘 피투성이가 된채 사망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보름이 지난 5월 6일

미키선장은 이제 한발짝도 움직일수 없을 만큼 병이 심해졌다. 

선원 12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선장뿐 살아남긴 했어도 둘다 각기병으로인해 소변도 대변도 가리지 못한다.

길을 잃은 배는 강한 바람에 계속해서 떠내려 가고 있다. 라고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들었던 의문은...


배에 탄 사람은 총 12명 이었는데 일지에 기록된 사망한 선원의 숫자는 총 9명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이 2명이라고 했으니깐 당연히 10명의 사람이 기록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왜? 미츠야 엔키치의 죽음은 왜 기록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은 이 사건이 쭉 밝혀지고 난 후에도 많은 의문을 일으켰지만

아직까지도 설명되지 못한 부분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5월 11일의 기록. 

북서풍이 세게 불어 돛을 달아 올렸다. 배는 남서쪽을 향해 항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산이나 육지나 다른 배의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장의 잔소리에 매일같이 울며 지낸다. 

배에는 동료의 시신에서 나는 살 썩은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시신 치우는 것을 이세상 내 마지막 일로 삼아야지.. 

그렇게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를 포류하던 료에이마루 호는 12명의 선원들이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어느덧 시간이 훌쩍 흘렀고, 출항한지 거의 10달만인 1927년 10월 미국의 화물선인 마가렛 달러호에 의해 발견됩니다.
 




조사팀은 남아있던 3권의 항해노트를 읽으면서 그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으며, 

선내에 있던 두 구의 미라는 미키 선장과 기록원 마츠모토 라는게 확인이 됩니다. 


이들의 시신은 미국에서 화장이 된 후에 일본 유가족들에게 보내졌는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다고 합니다. 


료에이마루 호는 유가족들의 의사에 따라 미국에서 소각됐고, 이 당시에 선박 사고는 대부분 배가 망망대해에서 침몰하게되어 어떤 일이 벌어진건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료에이마루 호에 자세하게 남겨진 일지 덕분에 추후 조사에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더 나아가서 한편으로는 크루시오해를 연구하는데 기여했다고 까지 평가되죠. 

1920년대 사건이지만, 현대 일본 기상학에서는 이 항해 일지를 토대로 료에이마루의 경로를 재구성 하는 연구도 진행했고, 여기에 참여했던 후지와라 사쿠헤이는 "어선이 일본에서 미국까지 이렇게 조류를 따라서 도달하고자 했던거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는거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사건 당시 미국의 언론사 측에서 '료에이마루 호가 조난 되고, 고립된 상태에서 결국엔 인육을 했다.' 라는 기사들을 보도했고 이 기사를 발단으로 선원들의 시신을 부검했던 한 의사 역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이 2명이 식인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라는 발언을 한게 문제가 되면서 사람들이 경악하게 되지만, 추후 선원의 친족이 당시의 항해 일지를 사람들에게 밝히면서 인육을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 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난 후 이 사건과 관련한 또다른 기묘한 사실 하나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미국의 화물선 웨스트 아이슨호의 1926년 12월 23일.

그러니깐 료에이마루 호가 표류하고 있던 그때 이 배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데,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상에서 파도에 떠도는 목조함을 발견했다. 구조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우리가 근처로 다가갔는데 배안에 선원들이 료우에이마루선의 창문이나 갑판에 서서 그저 

우리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 10명 정도로 보였는데 그들중 어느 누구도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저 아무말없이 우리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좀 바보같아 보이면서도 섬뜩했고,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것 같아 그들을 두고 떠났다. 라고 기록되어 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료에이마루의 항해 일지에는 웨스트 아이슨호를 봤다 라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데, 둘 중 하나의 기록이 거짓이거나 료에이마루호의 항해 일지에는 적을 수 없었던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건이 벌어진지 9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태평양을 포류했던 료에이마루 호.

그 시간들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기면서도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이지만 끝내 집에 돌아올수 없었던 12명의 선원들에게 늦게나마 그들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의 미스테리 사건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 감사드리고, 재미있으셨다면 다음 미스테리 사건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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