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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건/미제사건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의 전말. <미제>

by O.N.E 2021. 1. 12.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의 전말. <미제>


1991년 3월 26일.
이 날은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행된 이후 최초로 전국의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의원들을 뽑는 선거일이였습니다.
즉, 임시공휴일로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회사와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였습니다.
대구 성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동네아이 6명이 휴일이였던 이 날, 대구 달서구 성서 지역의 조호연군 집앞에 모여 놀고있었습니다. 
그 집에 세들어 살던 한 청년이 "시끄러우니 다른 곳에 가서 놀으라"고 다그쳤고, 이 아이들은 어디가서 놀까 고민하다 이들이 살고 있던 동네 야산인 와룡산에 올라갈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집에다가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분유깡통과 막대기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게 되죠.
하지만 이 후 5명의 아이들은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부모님들은 결국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하게 됩니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의 사망자


- 우철원 군 (1979년생, 당시 13세)
- 조호연 군 (1980년생, 당시 12세)
- 김영규 군 (1981년생, 당시 11세)
- 박찬인 군 (1982년생, 당시 10세)
- 김종식 군 (1983년생, 빠른년생으로 당시 10세)


이 중 유일하게 실종되지 않고 생존했던 김태룡 군(1982년생, 당시 10세)은 아침을 먹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아침을 먹고 친구들을 뒤따라가기로 했습니다. 
김태룡 군이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와룡산 입구에서 아이들을 따라잡았지만, 너무 멀리까지 나가지 말라던 엄마의 말이 떠올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당시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실종 되기 전까지 아이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종된 조호연의 형인 조무연 군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근처를 지나가다가 자신의 동생과 친구들마주쳤는데 "도룡뇽 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또한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고 계시던 한 아주머니도 일찍이 투표를 하기 위해 학교쪽으로 내려가던 와중 아이들을 목격합니다. 시간은 오전 9시쯤이였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우철원 군과 같은 반 친구였던 김 군과 이 군도 "정오 무렵에 우철원 군이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와룡산 입구에 있었던 것을 봤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4학년 함 군은 5명의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날 동네 형들과 같이 도룡뇽 알을 찾기 위해 산에 올라가다 중간에 형들과 헤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약 10초 간격으로 울린 두번의 다급한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합니다. 
함 군은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므로 11시 30분쯤이었을 거라고 증언했습니다.

아이들이 실종된 상황에서 누가 몇시에 이 아이들을 어디에서 봤냐는 것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갔던 아이들이 오후 6시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산 근처를 찾아 헤메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게 되죠.

하지만 당시의 경찰들은 선거날이였기 때문에 투표소 관리에 집중이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보니 실종신고를 받고 나서 초기 대응에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부모님들이 최초로 신고한 시간은 당일 저녁 7시 30분이였습니다. 
그리고 신고를 받고 나서 일부 경찰과 부모님들이 함께 새벽 3시까지 와룡산 부근을 다 뒤졌습니다. 

하지만 애들은 발견되지 않았죠.
결국 이 사건은 아이들이 실종되고 나서 일주일 후, 1991년 4월 2일 집단 가출로 처리되게 됩니다.





당시 대통령이였던 노태우 대통령은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언론에 타게 되니깐 특별지시를 내리게 됩니다. 
전국에 경찰, 군인을 다 동원해서 아이들이 실종 된 현장인 와룡산 일대를 다 뒤지게 했고, 가출을 했을 경우를 대비해 그 이후 지역까지 전국을 뒤지도록 명령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끝내 찾지 못했죠.

현상금이 굉장히 많았었던 탓에 허위제보도 많았었는데, 경북 구미에선 아이들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왔었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고 있다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가 됐다는 등 여러 제보가 나왔으나 찾지 못했으며,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놔라" 라든가, "내가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으니 ~로 아이들을 찾으로 와라" 등과 같은 장난전화가 빗발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실종 어린이들 중에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며 유가족들을 놀리는가 하며, 부모가 자녀를 시켜 장난전화를 시키기도 하는 등 아이들을 찾는 부모들과 경찰들을 허탈하게 만들어 수사에 혼선이 생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실 것 같은데, 왜 사건 이름이 개구리소년 이었을까요?


아이들은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갔다가 실종이 되게 된 것이였지만, 이게 언론에서 보도가 될 때 말이 와전되어 초기부터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으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 때 이후로도 쭉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들이 남무하면서 아이들 주변사람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한 범죄심리학자는 "실종된 김종식 군의 아버지가 아이들을 다 죽이고 집 근처에 암매장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을 하게 됩니다.
김종식군의 아버지는 아들도 잃었는데 이 음모론의 주인공까지 되면서 굉장히 힘들어 하셨고, 이 사건에 대한 휴유증으로 계속 술로만 삶을 보내시다 결국 2001년에 간암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한국의 3대 미제사건으로 아직까지 남아있을 정도로 사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전 국민의 관심을 계속 받아왔고, 그에 따른 대대적인 경찰수사가 계속 진행이 됐지만, 아이들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들의 뇌리에서는 잊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던 중 2002년 9월 26일. 
와룡산에 올라가서 도토리를 주우려고 했던 한 시민이 도토리를 줍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다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되었죠. 이 유골이 바로 개구리소년들의 유골이였습니다.
맨 처음 경찰이 가서 수색을 했을때는 4명의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나중에 한 명의 유골이 추가로 발견되었습니다.
처음 5명의 유골이 발견이 되면서 누구의 유골인지 궁금해 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러다 와룡산에서 발견이 되었다는 점, 5구의 유골이였다는 점때문에 혹시 개구리 소년이 아닌가하는 여론이 바로 나오게 됐죠.





실제로 1991년의 실종된 5명의 아이들 중 4명의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한 명의 아이는 비닐구두를 신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골과 함께 발견된 신발과 일치했습니다. 
게다가 현장에서 발견된 운동복이나 여러가지 옷가지 등에 김영규 군의 아버지가 그 옷을 보고 "내 아들의 것인게 확실하다"고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종됐던 조호연 군이 이에 보철을 하고 있었는데, 그 보철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DNA검사를 정확하게 거치기도 전부터 그렇게 가족들과 경찰들이 찾아 다니던 아이들이 유골로 발견 되었다는 게 확실해지게 되죠.





이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유골과 함께 탄피가 발견됐다는 점이였습니다.
유골이 발견된 상황에서 "이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는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사건 당시, 와룡산 근처에는 사격장이 있어 탄피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나 "그 사격장이나 근처에서 오발탄으로 인해 아이들이 죽은 것이 아니냐" 라는 가설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사건이 발생했던 선거일날 근처에 있었던 사격장에서는 전혀 사격이 일어나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발견된 아이들의 유골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아이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힘이 셌던 맏형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찍혀있던 상흔이 무려 25군데나 있었는데, 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범인에게 강하게 저항하다 본보기로 크게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의혹은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우철원 군의 두개골에 직힌 'ㄷ'자 모영의 상흔들이 흐트러짐 없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이였다는 점이였으며, 이것은 우철원 군이 죽기직전 살아있을 때 생긴 외상흔이라고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가장 막내였던 김종식 군의 왼팔이 골절되어있었는데, 이는 범인이 아이들을 뒤에서 붙잡고 오른손으로 흉기를 내려쳤었다는 가정하에, 왼팔을 먼저 들어서 막은 것으로 보아서 범인은 오른손잡이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으며, 아이들의 좌측 두개골에 나타난 상흔들을 보면 우측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친 것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김영규 군의 옷소매와 단추는 찢어져 있었으며, 강한 물리적 압력에 의한 것으로 매듭 역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누을 가리기 위해 묶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리 박찬인 군과 조호연 군에게는 특별한 외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다른 아이들이 먼저 희생되고 가장 마지막에 남아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됐을 당시 정확한 부검도, 현장감식 또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구 달서경찰서에서는 "아이들이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는 말도 안돼는 주장을 해서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에서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지게 됐지만, 그 외에 별다른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못했고, 범인도 알아 내지 못했으며,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를 했지만 범행에 쓰여진 도구 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2003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게 되었고, 2005년 11월 28일에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의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가며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습니다. 
결국 2015년에 내사마저 종결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하더라도 처벌할 수 없게 되었죠.


어린 아이 5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범인에 대한 어떠한 단서조차 찾지 못한 아주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사건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실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비록 처벌은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범인이 자수를 해서 지금이라도 마땅한 대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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